우리 문화유산 (166) 썸네일형 리스트형 백제를 대표하는 석탑,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 국보 제9호에 지정되어 있는 백제의 석탑이다.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였던 부여에 정림사라는 절터에 남아 있는 오층석탑이다. 현재 위치는 충청남도 부여군 정림로 83(부여읍)으로 정림사라는 절터에 남아 있다. 전라북도 익산시에 있는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현재 2기만 남아 있는 백제 시대의 석탑이자 가장 오래된 석탑 중 하나로서 그 가치가 아주 높다. 본래 이 석탑은 정림사라는 절 안에 세워졌지만, 백제의 멸망과 함께 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이 탑만 남았다. 훗날 이 절터에서 ‘정림사’라는 이름이 들어간 기와들이 출토되어 절의 이름이 정림사라는 것이 밝혀졌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현재 남아 있는 석탑 중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 중 하나.. 흥선 대원군의 집이자 고종의 잠저, 운현궁 ▲ 운현궁 전경 | 사적 제257호에 지정되어 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는 운현궁(雲峴宮)은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 대원군(1820~1898)이 살았던 저택이다. 그리고 그의 아들이자 조선의 제26대 왕인 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집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운현궁은 흥선 대원군의 집이자 고종의 잠저(潛邸: 왕세자가 아닌 사람이 왕위에 오르기 전 살았던 집)인 셈이다. 흥선 대원군은 아들인 고종이 12살의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어린 왕을 대신하여 섭정(왕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림)을 시작하였다. 무려 60여 년 동안 이어졌던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등의 세도정치가 끝나고 바야흐로 흥선 대원군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흥선 대원군은 무려 10년 동안 정권을 잡고 운현궁에 머무르며 여.. 한양 도성의 남쪽 대문, 서울 숭례문 ▲ 2013년 복구된 숭례문 지난 2022년부터 문화재보호법 시행령 개정에 따라 국보와 보물의 지정번호가 사라졌지만, 숭례문은 오랫동안 우리나라 국보 제1호로서 마치 우리나라 문화유산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숭례문은 지금으로부터 약 630년 전인 1396년에 세워졌다. 조선 왕조를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명령으로 한양 도성이 지어졌고, 그 한양 도성의 4대문 중 남쪽 대문으로 지어진 것이다. 숭례문이란 이름에 ‘예(禮)’ 자가 들어간 것은 오행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당시 한양 도성의 4대문과 보신각의 이름에는 유교에서 말하는 오행, 즉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한 글자씩 들어가 있는데 이중에서 ‘예(禮)’가 들어갔다. ‘숭례(崇禮)’는 말 그대로 ‘예를 숭상하다’라는 뜻이다. 숭례문은 그 후.. 대한제국의 상징, 환구단 ▲ 황궁우 | 환구단의 부속 건물로, 화려한 팔각 지붕을 가진 3층 건물이다. 현재 서울시 중구 소공동에 있는 환구단은 대한제국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문화유산이며,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외세의 침략이 절정에 달했던 조선 말기, 조선의 제26대 왕인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가 나라의 자주독립을 주장하는 국민들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자 고종은 자주 국가로서의 면모를 세계만방에 알리기 위해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으로 돌아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정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 석조대문 앞의 돌계단 ▲ 석고(돌로 만든 북) | 돌로 만든 북이란 뜻으로, 측면에 화려한 용 무늬가 새겨져 있다. 환구단은 1897년 고종의 황제 즉위식과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이곳에..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던, 사직단(社稷壇) ▲ 사직단 | 사적 제121호에 지정되어 있다. ▲ 홍살문 | 제단 주변을 둘러싼 담장에 네 방향으로 홍살문이 나 있다. ▲ 사직단 담장 | 홍살문이 설치된 두 겹의 담장으로 사방이 둘러싸여 있다. 우리는 흔히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역사 드라마에서 신하들이 왕에게 이런 말을 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전하, 종묘사직이 위태롭습니다.” 여기에서 ‘종묘사직’이란 국가나 왕조 그 자체를 뜻한다. 종묘는 역대 왕들의 영혼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고, 사직은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인 사직단을 말한다. 이렇듯 종묘와 사직은 국가와 같은 뜻으로 쓰일 만큼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조선 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도 한양에 수도를 정하고 가장 먼저 경복궁과 함께 종묘와 사직단을 만들도록 하였다. 궁궐.. 우리나라 최대의 왕릉군, 동구릉 ▲ 홍살문 | 각각의 왕릉 입구에도 홍살문이 있지만, 동구릉 매표소를 지나 들어가면 이와 같이 커다란 홍살문이 버티고 있다. ▲ 재실 | 제관들이 제사를 준비하고 대기하는 곳이다. ▲ 동구릉 안내도 | 가장 안쪽에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이 있다. 워낙 여러 왕릉이 있어서 관람을 할 때에는 동선을 잘 정해야 한다. 동구릉 매표소를 지나 재실이 나오면 왼쪽 길로 들어서서 맨 왼쪽부터 '숭릉 - 혜릉 - 경릉 - 원릉 - 휘릉 - 건원릉 - 목릉 - 현릉 - 수릉 - 재실' 순으로 시계 방향으로 관람하는 것이 좋다. 오르막이 거의 없고 평탄한 길로 되어 있어 걸어서 약 2~3시간 정도면 충분히 관람할 수 있다. ▲ 숭릉 | 18대 현종(1641~1674)과 원비 명성왕후(1642~1683)를 모신 쌍릉이다... 한성 백제 시대의 무덤군, 서울 석촌동 고분군 ▲ 서울 석촌동 백제 적석총 전경 ▲ 서울 석촌동 백제 적석총 고분군 입구 | 공원 안에 8기의 백제 초기 무덤이 있다. 사적 제243호에 지정되어 있는 서울 석촌동 백제 적석총 고분군은 서울시 송파구 석촌동 석촌호수 근처에 있다. 지하철 2호선 잠실역에서도 멀지 않고, 정확한 위치는 지하철 8호선 석촌역에서 배명고등학교 쪽으로 향한 지하차도 바로 위에 있다. 이 일대에 붙여진 여러 지명과 상호명에는 ‘석촌, 적석, 돌무지, 돌마리’ 등이 들어 있는데, 부르는 이름은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 공통점이 있다. 바로 ‘돌’이란 말이 들어간다는 점이다. 이 일대를 ‘석촌동’이라고 부르고 근처의 호수를 ‘석촌호수’이라고 부르는 것도 모두 이 고분군에서 유래된 것이다. 돌을 차곡차곡 쌓아올려 만든 무덤을 ‘돌무지 무.. 조선의 궁궐, 덕수궁 ▲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 | 본래 이름은 '대안문'이었다. 1. 정동에 자리잡은 궁궐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으며 서울시청과 마주 보고 있는 덕수궁은 많은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는 조선 시대의 궁궐이다. 덕수궁은 임진왜란 때에는 임금이 임시로 사용하는 궁궐이었으며, 특히 조선 말기에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오른 뒤에는 황제가 머무르는 궁궐로 사용되었다. 덕수궁의 본래 이름은 '경운궁'이었는데, 덕수궁이란 이름은 고종이 강제로 퇴위하고 나서 붙여진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비록 지금은 궁궐 안의 많은 건물이 사라지고 일부만 남았지만, 험난한 세월을 견디고 꿋꿋이 살아남아 시민의 휴식 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다. 또한 살아 있는 역사 교육의 현장이자 우리나라를 찾는 외국 관광객.. 이전 1 ··· 13 14 15 16 17 18 19 ··· 21 다음